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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승민, 새누리당의 소크라테스 ♠

작성자
강수연
작성일
20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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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156
내용

                                                                 유승민, 새누리당의 소크라테스 


                                                                            I


   ‘꼴통이란 무엇인가? 한 번 갖게 된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완고하게 고수하는 것 혹은 그런 사람을 흔히들 꼴통이라고 한다. 꼴통은 상대가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견해를 가졌다 싶으면 내심 대번에 선이 그어지고 상종하기 싫어진다. 이런 절벽 같은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극복하려는 사람은 - 예컨대, 학수이 같은 놈은 - 회색분자로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싫은 것이다.

   나이 들어 노틀이 되면 거의가 꼴통이 된다. 정치경제적[*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경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 대부분의 경우 정치경제가 된다] 사고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돌이켜보자. 젊었을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이나 견해를 경청하고, 비평적으로 토론하고, 그래서 그 생각이나 견해가 옳다 싶으면 서슴없이 받아드려 자신을 키워나갔다. 노틀이 된 지금은 어떤가? ‘죽으면 늙어야 한다는 말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주위를 보시라. <조선일보>만 보는 꼴통은 맨날 조선일보만 본다. 그래서 하는 소리가 늘 그 소리고 그 소리다. 나오는 가 똑 같다. <한겨래>만 보는 꼴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사이가 찜찜 별로인데도, 같은 쪼의 꼴통적 견해를 나타내면 대번에 서로 얼굴이 화아-안해지고 우정스러운 태도로 나온다. 하지만 잠깐 그런 것, 그것이 전부이다. 흔히 보는 꼴통우정의 얄팍함이다.

주위를 가만 보시라. 많이 가질수록, 한자리 했을/할 수록, 여기 더해 독서가 편협하거나 일천할수록 꼴통됨이 더욱 견고하다. 이유는 뻔하다. 이제 와서 자신의 꼴통됨을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가진다는 것/보인다는 것은 평생토록 매만지고 키워온 자신의 거룩한 아我, 스스로가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권위 즉 각오를 자기 손으로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꼴통성을 계속 견지하는 편에 어떤 이익, 어떤 유리함, 어떤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갑당 의원 혹은 을당 의원 혹은 병당 의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成人, 즉 인간으로서 완성을 이룬 군자이어서 항상 올바른 판단만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갑당 혹은 을당 혹은 을당이 모두 성인으로 구성된 당일 수가 없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안에 따라서는 비록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의 사안이라 하더라도 나름 잘/잘못 혹은 가/불가를 분간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수이 가아는 역시 학수이답게[허허허…]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가아는 마르크스 덕분에 서구자본주의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가 없었더라면 서구자본주의는 정말로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부딪쳤다고 생각한다. 가아는 뭔가를 좀 아는 나이 50에 뉴질랜드에 가서 15년을 살면서 뉴질랜드가 마르크스의 인간주의적 측면을 적절히 수용함으로써 건전한 자본주의사회를 향유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아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기계론적 역사주의를 한낱 천재 사변가의 당시 시대철학적 픽션물이라고 본다. 또한 가아는 사르뜨르 실존철학의 한 자락 표현인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마르크시즘에 왜곡되이 해석해 넣음으로써 폭력혁명론을 주장하고 감행한 스탈린은 지옥 구들목에 처넣어졌다고 믿는다.

   학수이 가아는, 다들 짐작하다시피, 기본적으로 진보(Centre Left)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특정 사안이나 이슈에 대해 비평할 때는 보수냐 진보냐 혹은 어느 정당이냐를 고려하지 않는다. 시장근본주의인 신자유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그래서 장기적 안목에서 모든 인류와 함께 나아가면서도 진정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할 수 있느냐가 근본적인 고려 사항이다.

   예를 들자면, 가아는 서구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한낱 수사학적 명제가 되어버린,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불변의 명제인 홍익인간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학교교육이 - 특히 인성이나 인간관계 교육에 있어서 - 전교조가 지향하는 서구식 법치주의, 서구식 민주주의, 서구식 평등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반대한다. 또한 무차별적 학교급식을 반대하고, 홍준표 식의 선별적 학교급식을 지지한다. 일찍부터 요람에서 무덤까지수준의 복지를 구현하고 있는 뉴질랜드에서도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규모의 무차별적 학교급식을 한다는 것은 생각에도 없다. 물론 그것을 하면야 좋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현실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과도한 포풀리즘의 산물이다.

   가아는 더 이상의 햇빛정책을 반대한다. 그러나 과거 진보정권이 했던 그 정책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그간 우리는 동족애와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그들에게 할 만큼 다했다. 할 만큼 다 해보지도 않고 선을 그어버렸다면, 진보는 보수에게 할 말이 많아진다. 그러면 보수 역시 보수로서 거기에 대응해서 할 말이 많아진다. 결국 보수 진보 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자주적 국방안보의 근본토대인 국민총화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제는 미련 없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햇빛정책으로 그토록 퍼주었음에도 북한정권은 날로 더욱 못된 짓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데도 햇빛정책을 계속 주장한다면 그것은 꼴통진보의 이념적 매몰이다.

특히 이념적 매몰은 극단주의로 흐르기 쉽다. 특히 이념적 매몰로 인한 극단주의는 당해 문화집단 나아가 인류문명에 큰 해악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역사는 누누이 보여주고 있다. 인류문명의 존속·번영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문화원리, 즉 차이/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극단주의는 필경 배타주의이다. 극단주의와 배타주의, 이 두 속성의 종교근본주의가 발로된 사태가 십자군전쟁이었고, 그것에 대한 보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작금의 IS 테러이다. 또한 그 두 속성의 정치경제근본주의의 발로가 히틀러의 우파 전체주의이고, 스탈린의 좌파 전체주의이다. 시장원리주의인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전 지구적으로 이윤극대화를 냉혈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지금 세계인구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고 그 상황은 더욱 암담해지고 있다. 다들 보도를 보고 뜨거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올해 아프리카의 기아는 유엔 창설이래 최악이다.

   우리 땅에 미국의 사드를 들여놓는 문제에 대한 학수이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군사무기(체계)에 관한 깊은 지식과 더불어 천리는 내다보는 고도의 외교정치학적 안목이 있어야 한다. 가아는 그 문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실력이 텍도 없다.


   보수고 진보고간에 꼴통들에게는 이러한 학수의 생각과 태도는 쓸모 없는 회색적 답답함이고 찝찝함이다. 꼴통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당의 사안이라면 무엇이던지 딱 부러지게 다 옳고, 거기에 대한 반대는 무엇이던지 딱 부러지게 다 그르다고 열을 낸다. 누구의 부정을 비판하면, 그 반대의 꼴통은 과거 누구 누구도 그랬다고 혹은 그보다 더했다고 되받아 친다. 당시 당시마다 현 정부의 어떤 부정부패를 밝혀내어 의법처리를 주장하면, 그 반대의 꼴통은 어떤 정부에 있었던 그와 유사한 부정부패를 들추어 역공하면서 낮뜨거울 정도의 과감한 궤변도 서슴지 않는다. 옛날에 그냥 넘어갔으니 지금도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정치적 발전, 선진국으로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인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소가 웃을 일이다. 놀라운 것은 꼴통들의 그러한 무대까리 언설일수록 용기 있고, 지조 있다고 높이 평가된다는 사실이다. ‘명석판명한 코기토적 이성, 과연 그런 것이 있는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정치경제에 있어서 꼴통보수가 많이 포함된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자들이 있다. 이들은 유승민 의원을 배척해마지 않는다. 이유는 알다시피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승민이, 자신을 정치가로 만들어준 박근혜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그자는 정치가 이전에 벌써 인간적으로 글러먹었기 때문에 아예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자신이 금 수저임에도 흙 수저를 위한답시고 따뜻한 보수라는 기치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태생적 계급으로 보아 그 기치에 진정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자신에 대한 지지의 폭을 넓히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먼저 전자에 관해서 냉철하게 한 번 말해보자. 세속에서 사람들간의 사회적 관계는 상호적이다. 특히 정치의 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유승민은, 당시 박근혜의 말과 처신에서 그녀의 정치경제적 이념이 자신의 그것과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섰기 때문에 그리고 박근혜 역시, 다들 알다시피, 그 믿음에 대한 호감을 그에게 나타냈기 때문에 그녀의 측근에서 멘토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만약 그에게 그런 믿음이 서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녀의 캠프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오직 정치적 야심에서 그녀의 캠프에 들어가 일했다고 단정한다면, 그게 바로 꼴통적 단정이다. 보편의 상식과 합리적 추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대까리단정인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당연히 유승민은 그녀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박근혜가 대선과정에서 김종인의 경제민주화이념을 받아드린 것을 보고 역시나 하고 크게 고무되었을 것이다. 심지여 그녀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잘 못한 점이 있다고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사죄까지 했다. 이를 두고 조갑제는 박근혜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었다고 분노했다.

   유승민이 볼 때, 또한 모든 이의 눈에도, 당선 후에 박근혜의 실제 정치경제적 행보는 끝내 그게 아니었다.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새누리당, 보수 언론, 보수 꼴통들로부터 크게 비판 받았다. 비판 정도가 아니라 조롱까지 당했다. ‘경제학 그 어디에도 없는, 보도 듣도 못한 경제민주화. 이거 어디서 주워온 것이며, 도대체 그 개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꼴통화 되면 사고까지 경직되는 법이다. 경제민주화, 이 얼마나 명료한 개념의 명제이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고 중차대한 과업인가. 간단히 말해 재벌기업과 대기업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발주기업과 수주기업간, 고용자와 피고용자간 등등 경제행위자들간의 경제행위를 평등하고 공정하게 민주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더욱 견실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자, 박근혜는 경제민주화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하지만 결코 자신의 경제민주화를 포기할 수 없는 김종인은 표표히 새누리당을 떠난다. 이 또한 유승민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으리라.

   유승민은 떠나는 김종인과는 달리 자신에게 함양되어 있는 따뜻한 보수라는 정치경제적, 철학적 소신을 흔들림 없이 계속 밀고 나간다. 이러한 유승민을 겨냥해서 끝내 박근혜는 배반의 정치를 심판하고 진실한 정치가를 세워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이로 인해 친박위에 군림하는 진박이 대두된다. 이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박근혜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적 토대인 새누리당 내부에 정파적 갈등과 분열을 가일층 복잡·심화시키는 불씨를 심은 것이다. 이 불씨로 인한 불이 예상 외로 커지고 심각해지자, 당황한 박근혜는 급기야 유승민을 반박의 핵심이라 보고 그를 배반자로 낙인처서 결국 국회에서 찍어냈다’. 유승민이 조금만 소신을 굽혔더라면 그런 정치적 사형死刑/私刑이 없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굽히는 척이라도 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떵떵거리는 자리를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늠름하게 그 사형을 받았다. 하늘의 뜻을 믿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맹자>에서 하늘은 백성이 보는 데로 보고, 백성이 듣는 데로 듣는다고 했다.

   원 내외에서 두루 지지가 탄탄한 실력자, 눈에 가시 같던 유승민이 찍혀나가자 특히 진박은 입이 쩍 벌어지고 기세가 더욱 등등해진다. 때마침 국회의원 지역구공천 시기가 왔다. 특히 진박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정파적 적이 될 가능성이 큰 유승민을 아예 정치의 장에서 제거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일찍부터 청와대 이 든든한 이한구는, 최경환 그리고 박근혜가 누님 ( )가 필두인 진박들의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엄호를 받으면서, 소피스트적 궤변과 비열한 방식으로 그야말로 칼 춤 추듯이 횡포를 부려엄청난 거악巨惡을 저지르면서 유승민의 정치적 목줄을 끊어버렸다. [* 단식 중에 이정현은 정세균의 그 말 한마디를 두고 칼 춤 추듯이 횡포를 부렸다이건 거악巨惡이고 엄청난 부조리라고 비난했다. 어- 허허허실소를 금할 수 없다.]

   결국 배반이란 강자 박근혜의 언어이고, 강자 측의 시각인 것이다. 냉철하게 따져보자. 도대체 누가 누구를 배반했단 말인가? 유승민이나 김종인은 시종일관 자신의 신념과 철학 대로 나아갔을 뿐이다. 배반이라면 오히려 박근혜가 유승민을 배반했다. 박근혜가 강자이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유승민이 배반자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후자에 관해서 말해보자. 경제민주화와도 비슷한 맥락인 바, 경제발전이 가져오는 혜택을 국민 모두가 편향/편파됨 없이 누릴 수 있도록 도모하는 따뜻한 보수를 하겠다는 유승민이다. 가진 자/기득권 자가 우선시되는 경제를 지양止揚(Aufheben)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진정 이 나라 경제에 주인이라는 의식이 들게끔 따뜻한 마음으로[‘은 포개진 두 개의 방석 위에 않은 사람, 즉 따뜻한 사람을 상형하고 있다. ‘천명지위성으로서의 인간 본래의 따뜻한 마음,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인仁한 마음이다] 경제를 해나가자는 것이다. 대동大同사회를 지향해서 가진 자/금수저가 가지지 못한 자/흑수저까지도 따뜻하게 껴안는 정치 그래서 보다 큰 국민총화를 이루어 보다 건강하고 튼튼한 조국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오호 꼴통 보수들이여, 그렇게도 비판 받고 비아냥거려질 일이란 말인가? 도대체 당신들은 이 땅에 정치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켜 대한민국을 계급적으로 쪼개야만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바로 당신들이 의도와는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싹트게 하고, 키우는 자들이다. 자생적인 친북 빨갱이를 생산하는 주요 원인자들인 것이다.


                                                                           II


   ‘유승민하면, 소크라테스가 생각에 떠오른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그리스의 다양한 신들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지배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신들에 앞서 그리스 고래의 로고스우주관을 믿었다. 다시 말해, 생활문화적으로는 그가 그리스의 제신들을 믿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에서 신은 로고스라는 우주적 형이상학자 곧 이성이었다[그래서 서구문명을 두고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라고 한다]. 이것이 그가 그리스문명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게 된, 스스로도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내면에서 늘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에게 신은 맥락에 따라 우주적 보편질서로서의 로고스이기도 하고, 우주적 보편사유로서의 이성이기도 하고, 우주적 보편도덕으로서의 양심이기도 하며, 또한 이데아 중에 지고至高의 이데아인 선善 이데아이기도 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가 아테네의 신을 믿지 않는다 혹은 다른 신을 아테네로 들여왔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당시 아테네의 민주제도에 의해 소크라테스를 재판한 재판관은 30세 이상의 성년남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추첨된 500명이었다. 이들 중에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조금만 양보 했더라면, 아니 조금 굽히는 척이라도 했더라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늠름하게 죽음을 택했다: 이제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편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파이돈>이 보여주는 바, 그는 사후에 자신의 영혼이 신의 세계(hades)로 되돌아갈 것을 믿어 독배 앞에서도 놀랍도록 평온했다.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적 생각에서 볼 때,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지고의 선 이데아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불교로 말하면, 열반涅槃에 든 것이다. 개별 중생이 성불成佛하면 윤회사슬이 끊어지고 본래의 우주적 원불源佛/元佛로 되돌아간다/그것과 하나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선을 구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보시를 함으로써 열반에 든 것이다

     

   페르시아전쟁에서 대승한 아테네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참패함으로 인해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이 좌절되고 30인 참주의 전제정치로 인해 신음하다가 다시 민주정치로 돌아오자, 소위 소피스트들이 여러 지방에서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특히 중요시 하는 것은 웅변술이었다. 대중선동이 권력을 손에 넣는 첩경이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웅변술이 정치가나 정치지망가 혹은 남에게 뭔가를 내세워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프로타고라스는 웅변술 혹은 수사학의 궁극 목적이 ‘무력한 이론을 유력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는 언제나 인간의 필요와 관련해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이나 행위에 있어서 보편적 기준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주관주의이며, 이현령비현령 식의 주관적 상황논리를 긍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당시 아테네의 민주정치와 사회분위기는 다분히 중우衆愚적이었다.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덕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과 향락과 명애와 권력을 탐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생득적으로 품부된 이성이 무디어 져버렸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의 이성을 일깨워 조국 아테네가 진정 선과 정의에 기반된 아테네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나섰다.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소위 소크라테스적 논법(Socratic dialectic)이다. 질문과 대답을 기본으로 하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우연인가 어떤 섭리인가, 그의 어머니는 산파였다고 한다. 산파의 역할은 남의 출산을 돕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마치 산파인 자기 어머니가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에게 내재된 이성을 일깨우도록 도와주었다. 자신이 임신을 해야만 제 아이를 얻듯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이성을 일깨워야만 참된 이성이 발휘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소위 소크라테스적 반어법(Socratic irony)을 구사한다. 짐짓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혹은 대화상대보다 더 어리석은 것처럼 꾸미면서, <크리톤>에서 크리톤과 소크라테스 간의 대화에서 보는 것처럼 귀납적 논리가 정연하도록 질문을 해나가서 그의 질문에 말려들도록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귀납법의 창시자라고 했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성을 이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스스로가 이성을 회복하도록, 즉 스스로가 선하고 정의로운 생각과 태도에 이르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학식 있고 가문 좋은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를 따르고 추종했다. 장소와 상대를 가지리 않고 그러한 대화와 토론을 일삼는 소크라테스는 당시 권력자를 포함한 많은 유력인사의 양심을 찌르는,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점을 알고 있는 그는 스스로도 자신을 등에 - 말이나 소에 달라붙는, 몸이 크고 잔털이 많은 일종의 파리 - 에 비유했다. 플라톤은 <변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이 나라에 달라붙도록 한 등에입니다. 이 나라는 혈통이 좋고 몸집이 크지만 둔해져서 각성이 필요합니다. 신이 나를 마치 등에처럼 온종일 어디든 그 누구라도 따라가서 붙잡고 설득하고 비난하고 각성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은 누가 잠을 갑자기 깨웠을 때 화내는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내면서 아뉘토스[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주모자]의 말만 믿고 나를 경솔하게 죽일 테지요. 

     

    진정 아테네를 위해 등에 역할을 한 소크라테스. 그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반성과 각성을 회피하는 당시 보수적인 권력가와 명망가들은 그에게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에 더해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죄목을 추가해서 결국 그는 독배를 마시게 된다. 그의 육신은 죽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플라톤 철학이 내다 본 대로, 정의롭고 아름다운 지고至高의 선善 이데아로 되돌아가서/그것과 하나가 되어 서구문명의 보편적 질서 속에, 서구인의 이성적 사유 속에 세세토록 살아있다.

    유학의 존재론은 이일분수理一分殊이고, 도가는 도일분수道一分殊이며, 불교도 불일분수佛一分殊인 바, 플라톤 철학에서도 역시 이데아일분수이다. 흑수저가 흑수저를 껴안는 것도 큰 선善일진대, 자신은 금수저임에도 흑수저까지도 모두 껴안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늠름하게 죽음을 감내하면서 분투하는 유승민. 당신이야말로 선 이데아의 분수分殊이어라

  

                                                                   III


    당시 아테네의 페르시아전쟁 승리, 이에 따른 아테네의 오만함과 나태함, 이로 인한 스파르타와의 전쟁 참패, 소피스트들과 중우적 사회 분위기, 반성을 두려워하는 보수 정치가들, 소크라테스를 죽이기 위한 아뉘토스 일파의 궤변적 선동, 소크라테스의 늠름한 최후 연설과 의연한 죽음

   여기에 오버랩 되어 떠오르는 당시 새누리당의 대선 승리; 이에 따른 새누리당의 오만함과 나태함; 이로 인한 총선 참패; 책임회피에 급급하면서 반성을 두려워하는 극 보수 정치가들; 대선 한 번 치렀다고 해서 청와대가 만사의 척도인 꼴통보수들; 이들에 대항해서, 결코 청와대가 헌법 제1조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역설하는 유승민; 이러한 유승민을 죽이기 위해 펼쳐진 청와대와 이한구를 필두로 하는 진박 일파의 그 비겁한 궤변적 선동;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드리는 유승민의 그 늠름한 태도그 때 우리들 마음에는 당신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소: ‘이제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편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승민, 당신은 맹자가 말한 그 하늘의 뜻을 올바로 읽었소.

당신은 새누리당이 정의롭고 선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내리신 큰 인물이오.

당신의 따듯한 보수이념에 반드시 하늘의 가호가 있을 것이오.

건투를 비오!

 

강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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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는 대실수이다. 장년기는 투쟁이다. 그리고 노년기는 후회이다.(디즈레일리) 나는 나 자신을 빼 놓고는 모두 안다.(비용)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버틀러)" 그것이 가치있는 사람이다.(엔니우스)" 자기 자식을 아는 아버지는 현명한 아버지이다. 세상이 당신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이 세상에게 주라.(헨리 포드) 악은 선을 인식시키고 고통은 기쁨을 느끼게 한다.(그리스도) "모든 일은 계획으로 시작하고 나는 나 자신을 빼 놓고는 모두 안다.(비용) 희망은 가난한 인간의 빵이다.(탈레스)
☜♧인내하라.경험하라.조심하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조셉 에디슨) 천재란 인내에 대한 위대한 자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뷰퐁) 좋은 일을 많이 해내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의 좋은 일도 해낼 수가 없다.(사무엘 존슨)
◇ 정의로운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는 없다.(프랭클린) 위대한 사람은 절대로 기회가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에머슨) 자유는 획득하는 것보다 간직하는 것이 더 어렵다.(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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